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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파란불은 사실 초록불이다.'에서 시작해서 파란색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하는 고대 그리스 이야기까지.
색깔을 지칭하는 '이름'이, 색깔을 바라보는 우리 눈을 어떻게 바꾸는지 따라가 보았다.

빨간불이었다. 횡단보도 앞, 그것도 차선 제일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신호가 바뀐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고, 여지없이 뒷차는 '빵' 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아내도 한마디 거들었다.
"파란불이야. 출발해."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냥,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집 벽면 전등 스위치를 멀거니 보다가 문득 '저게 원래 저렇게 생겼던가..?' 싶어지는, 익숙한 게 갑자기 낯설어지는 그 느낌. 미시감, 자메뷔. 하필 그날은 이 '파란불'이라는 단어에 그 미시감이 꽂혀버렸다. '저게 왜 파란불이야? 어딜 봐도 초록불인데.' 어쨌든 일단 출발은 했다. 뒷차가 기다리니까.
국립국어원도 '파란불'과 '초록불' 둘 다 맞다고 한다.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멀쩡한 초록을 굳이 파랑이라고 부르게 됐을까.

다른 나라는 저 불을 뭐라고 부를까
먼저 우리만 이상한 건가 싶어서 다른 나라를 찾아봤다.
영어는 'green light', 프랑스어는 'feu vert', 스페인어는 'luz verde'. 죄다 '초록'이다. 사실 신호등 색은 국제 협약(빈 협약)으로 '가시오=초록'이라고 정해 둔 거라, 대부분의 나라가 그냥 초록이라 부른다. 그러니 초록을 초록이라 부르는 게 글로벌 표준이고, 우리가 좀 별난 축이다.
그런데 딱 한 나라, 우리랑 똑같이 별난 데가 있었다. 일본이다.
일본은 저 불을 '아오신고(青信号)', 그러니까 '파란 신호'라고 부른다. 신호등만이 아니다. 풋사과를 '아오링고(青りんご, 파란 사과)'라 하고, 우거진 산도 '아오야마(青山)'다. 옛 일본어에서 '아오(青)'가 파랑과 초록을 통째로 덮는 말이었고, 초록만 따로 가리키는 '미도리(緑)'는 나중에 자리 잡은 단어라서 그렇다고 한다. 우리 '푸르다'랑 거의 판박이다.
압권은 그다음이다. 신호등이 분명 초록인데 사람들은 자꾸 '파랑'이라 부르니, 언어학자들과 행정부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1973년, 일본 정부가 내린 결론이.. 말을 바꾸는 대신 '신호등을 최대한 파란 쪽에 가까운 초록으로 만들어라'였다고 한다. 현실을 말에 맞춰버린 거다. 그래서 일본 신호등은 진짜로 파르스름한 청록빛이 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파란불을 만들어 버린것.

| 나라/언어 | '가시오' 신호를 부르는 말 | 직역 |
| 한국어 | 파란불 | 파란 불 |
| 일본어 | 아오신고(青信号) | 파란 신호 |
| 영어 | green light | 초록 불 |
| 프랑스어 | feu vert | 초록 불 |
| 스페인어 | luz verde | 초록 불 |
이쯤에서 슬쩍, 이게 그냥 한국어와 일본어의 별난 변덕일 뿐일까, 아니면 다른 언어에서도 이 비슷한 사례가 있는게 아닐까, 검색의 범위를 넓혀보았다. 그랬더니.. 초록을 파랑이라 부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랑'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언어도 있다.
'파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고대 그리스

시계를 한 2,800년쯤 돌려 호메로스의 시대로 가 보자.
고대 그리스엔 '파랑'이라는 말이 사실상 없었다고 한다. 이걸 처음 진지하게 짚은 사람이 19세기 영국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다(나중에 총리까지 한 사람인데, 호메로스 덕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는 1858년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이 잡듯 뒤지며 색깔 단어를 다 세어봤는데, 파랑이 도무지 안 나오더라고.
가장 유명한 게 호메로스가 바다를 부르는 표현, '와인색 바다(oinops pontos)'다. 포도주 빛 바다라니. 두 서사시에 걸쳐 여러 번 그렇게 부른다. 하늘은 파랗다고 안 하고 '청동빛'이라 하고, 꿀도 나무도 심지어 겁에 질린 사람 얼굴도 죄다 같은 단어 'chloros(초록/연두 비슷한)'로 뭉뚱그린다. 후대에 파랑을 뜻하게 되는 'kyanos'라는 말이 있긴 한데, 호메로스에선 제우스의 '눈썹'에 붙어서.. 파란 눈썹이라기보단 그냥 '어둡다' 쪽 의미였다고 본다.
여기서 '그럼 그냥 호메로스가 색맹이었던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지 싶은데, 그건 좀 억지다. 글래드스턴 본인도 나중에 '색맹이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발을 뺐다. 고대 그리스 사람도 우리랑 똑같은 눈을 가졌을 거다. 당연히 가시광선 범위 내의 다양한 색깔들을 스펙트럼으로 인지할 수 있었을거고, 그에 따라 특정 범위의 색들을 지칭하는 단어 역시 있었을거다. 호메로스 역시, 당시 언어에 그런 어휘가 있었다면, 그 어휘들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바다색, 하늘색은 관용적으로 붙이는 이름이, 그때에도 당연히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시, 당시 그리스에서는 색깔에 대한 어휘가 적었고, 파랑을 뜻하는 어휘가 없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다만 색을 '밝다/어둡다' 위주로 보고, 색조(hue)에는 일일이 이름을 안 붙였던 쪽에 가깝지 않을까. 재밌는 건 이 '파랑 없음'이 그리스만의 일이 아니라는 거다. 구약 성경을 비롯해 여러 고대 문헌에서는 파랑이 유독 늦게, 혹은 거의 안 나타난다고 한다.
그랬던 그리스, 지금은 파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두 개

좀 재미있는 대목이 하나 있다. 파랑이라는 말조차 없던 그 고대 그리스어의 후손인 현대 그리스어는, 현재 '파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오히려 둘로 늘었다. 'ble(파랑)'과 'galazio(연파랑, 하늘색)'를 거의 다른 색처럼 따로 쓴다고 한다. 러시아어도 비슷해서 'siniy(진파랑)'과 'goluboy(연파랑)'를 나눈다.
같은 핏줄의 언어가, 2,800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파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0개에서 2개가 된 셈이다. 이쯤 되면 색 이름이라는 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게 아니라, 시대에 따라 하나씩 생겨나고 또 쪼개지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에 오는 색, '파랑'
흥미롭게도 이런 색깔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겨나고 세분화되는 데에는 뭔가 공통점? 유사한 흐름? 같은 것이 있더라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 그리스어, 현대 그리스어 만의 일이 아니다.
1969년에 벌린과 케이라는 두 학자가 세계 여러 언어의 색 이름을 비교했는데, 언어들이 색 단어를 얻는 순서가 거의 비슷하더라는 결과를 내놨다. 대충 이런 순서다. 흰색·검은색(밝다/어둡다) 먼저, 그다음 빨강, 그다음 초록과 노랑, 그리고.. 파랑은 거의 꼴찌로 등장한다.
왜 하필 파랑이 꼴찌냐. 생각해보면 자연에 '파란 물건'이 의외로 드물다. 파란 동물이나 곤충도 귀하고(동물의 숲에서 잡았던 몰포나비가 생각난다. 실제 몰포나비 표본을 봤을땐, 정말 너무나도 화려한 그 파란 색에 충격을 받았다), 파란 염료나 안료는 만들기가 어려워서 옛날엔 굉장히 귀한 재료였다. 하늘이나 바다가 파랗긴 한데 그건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보니, 이름을 붙일 동기가 늦게 생겼다는 가설도 있다. 물론 이 '순서 법칙'은 이후에 반론도 많이 받아서 지금은 꽤 느슨하게.. 뭐랄까, 칼같은 '법칙'이라기보단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는, '경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 단계 | 언어에 이름이 생겨나는 색깔 |
| 1단계 | 흰색, 검은색 (밝다/어둡다) |
| 2단계 | 빨강 |
| 3단계 | 초록, 노랑 |
| 4단계 | 파랑 |
| 그 이후 | 갈색, 분홍, 보라, 주황, 회색.. |
그래서.. '인지'를 지배하는 '언어'의 힘이란,
여기서 다시, 이 색깔의 '이름'과 우리의 '인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미비아의 힘바족은 파랑과 초록을 한 단어로 묶어 쓴다고 한다. 실험을 해보면, 자기네 언어가 단어로 가르는 색 경계는 귀신같이 빨리 집어내는데, 파랑과 초록처럼 단어가 따로 없는 경계는 잘 못 가른다고. 여기서 '힘바족은 파란 사각형을 아예 못 본다'는 식의 방송용 과장이 돌기도 하는데, 그건 사실과는 다르다. 못 보는 게 아니라 덜 도드라지는 것이다. 그냥 파란 사각형과 초록 사각형을 구분하는게 조금 더 오래 걸리거나 버벅인다는 정도라고 해야 하나. 구분 못하는 건 아니다.

러시아어 두 파랑으로 한 실험(2007년)은 더 절묘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진파랑과 연파랑의 경계를 넘는 색 구분을 남들보다 빨리 한다고 한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딴 숫자를 외우게 해서 '언어'를 잠깐 막아두면, 그 빠른 차이가 사라진다고 한다.

즉 언어는 우리가 색을 보는 그 순간에 실시간으로 이것을 구분하는 작업을 슬쩍 거들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눈은 아마도, 가시광선 내의 빛의 파장을 다 비슷하게 볼 것이다. 다만 언어는 그 위에 '경계선'을 그어 준다. 같은 무지개를 놓고도 어디서 자르느냐가 언어마다 다른 거다. 눈이 다른 게 아니라, 구분선이 다른 셈이다.
여기까지 오면 슬그머니 궁금해진다. 그럼 호메로스의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와 하늘을 대체 어떻게 봤던 걸까. 우리처럼 파랗게 보면서 이름만 안 붙였던 걸까, 아니면 정말 조금 다르게 느꼈던 걸까. 사실 우리는 지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과도 '네가 보는 파랑이 내가 보는 파랑과 같냐'를 증명하고 확인할 수 없다. 하물며 2,800년 전 사람을 붙잡고 인터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건 아마, 영영 모를 일이다.
어쨌든, 다시 신호등 앞에서
그러고 보면 우리 '파란불'도 틀린 게 아니었다. 한국어가 세상을 자르던 옛 방식의 흔적이다. '푸르다'라는 말 하나로 푸른 하늘도, 푸른 산도, 푸른 신호등도 다 덮던 시절의 화석. 일본의 '아오'가 그렇듯, 우리의 '푸르다' 역시 그렇다.
그날 아내가 '파란불이야, 출발해'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틀린 건 하나도 없는데 그냥 갑자기 낯설게 들렸을 뿐이다. 익숙한 단어 하나에 미시감이 꽂히는 바람에, 나는 신호 대기 몇 초 사이의 찝찝함을 붙들고 호메로스의 와인색 바다까지 끌려갔다 온 셈이다.
아마 다음에 또 아내가 '파란불'이라고 하면, 나는 잠깐 그 초록을 곱씹어 보다가.. 할 시간이 있겠어? 그래도 일단 출발은 해야지. 뒷차가 기다리니까. 아니, 그보다, 일단 운전대 잡고 정신을 차려야겠지. 전방주시 태만은 금물이다.
글 닫기 전에..
고대 그리스 사람 색맹설???
그럴리가. 당연히 가시광선의 파장을 받아들이는 눈은 현재 우리와 같았을 것이다. 그저 색을 표현하는 단어와 범주가 달랐을 뿐이다. 색맹설은 글래드스턴 본인도 부인했다.
한국어 '푸르다'도 같은 맥락일까
그렇다. 원래 파랑과 초록을 함께 덮던 말이고, 신호등 '파란불'이 그 흔적이 남은 화석 같은 거다. 혹은, '청출어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푸른색 염료를 얻기 위해 사용한 쪽풀이 녹색이었으니.. 근본적으로 같은 색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럼 색 이름이 많은 언어를 쓰는 사람은 색이 더 잘 보일까?
이것은 나도 정말 궁금한 부분이다. 하지만 아마도, '더 보인다'기보단 '더 빨리 가른다'에 가깝지 않을까. 그것도 아주 살짝.
일본 신호등은 진짜로 파란색인가?
검색해보면 일부는 정말 파란색인 것 같다. 법으로도 그렇게 만들라고 했으니까.. 진짜 파란색을 섞어 쓰는 것 같다. 나중에 일본에 가보게 된다면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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