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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 말하면 더 대담하고 이성적이 된다?

트롤리 딜레마 실험부터 감정 둔화냐 숙고 강화냐 두 가설, 동아시아 예외까지.

영어 발표 경험과 엮어 외국어 효과를 알아보았다.


외국어로 말할 때, 우리는 어쩌면 조금 다른 사람이 되는게 아닐까?

 

 

대학원 비즈니스 영어 수업에서 발표 과제가 있었다. 주제를 직접 잡아 영어로 대본을 짜고, 제한 시간 동안 떠들어야 하는 과제.

 

솔직히 나는 학부 전공 성적이 별로였다. 고시원에서 보낸 학기를 포함해서 우울한 성적을 많이 받았고, 졸업한 지도 오래됐다. 그래서 그랬던 내가 전공 이야기를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 있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정작 그날 가장 무서웠던 건 전공이 아니라 '영어' 그 자체였다. 그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나는 오히려 전공으로 도망쳤던 것 같다. 학부 때 배운 특수 상대성 이론을 주제로 잡고 장황하게 떠들어 댄 것이다. 뭐,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은 발표였고, 영화 '인터스텔라'를 곁가지로 끼우면 재밌게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밀히는 인터스텔라에서 정작 시간이 가장 많이 느려졌던, 1초마다 지구에서 하루가 지나가던 그 행성은, 중력에 의한 현상이니 일반 상대성 쪽이다. 반면 쌍둥이 역설로 대표되는, 즉 '속도 때문에 시간이 느려지는' 특수 상대성 쪽은 영화에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어쨌든 발표 핵심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가 포인트였다. ㅎㅎ 그냥 넘어가자.

 

발표를 들은 사람은 아마 내가 전공에 엄청난 애정을 가진 줄 알았을 거다.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과목인데 말이지. 그날 밤새 만든 발표자료를 제출하며 문득 든 생각은, 만약 한국어로 하라 했으면 내가 이렇게 떠들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자신 없는 영어로 오히려 더 뻔뻔하게 떠들다니. 가장 불편한 언어로 말할 때 가장 대담해지다니?

 

내가 영어를 '잘해서'는 일단 아니다

흔한 오해부터 치우자. '영어를 잘해서 자신감이 붙은 거 아니냐'고? 전혀 아니다. 부끄럽지만 내 영어는 지금도 '한국어로 생각한다 → 영어로 번역한다 → 입으로 뱉는다'는 3단계를 거친다. 버벅거리다 단어를 못 찾고 결국 입을 다물기 일쑤다. 그러니 그날의 대담함은 실력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다. 물론 스크립트를 짜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고, 연습하고, 심지어 그냥 그걸 들고 보면서 발표하기는 했다(시선 처리는 나름대로 중간중간 티 안나게 잘 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은 학부 전공과 무관한 곳이라, 물리 전공이 아마도 나 혼자 뿐이기도 했고.. 공식을 풀어 헤치며 깊이 들어가서 뭔가 증명하는 발표가 아닌, 그냥 재미있는 개념에 대한 설명을 재미있는 수준까지만 설명하는 발표였을 뿐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알고 보니 심리학에 이름까지 붙은 현상이 있었다. 바로 '외국어 효과(foreign language effect)'.

 

(잠깐 사족을 붙여보자면.. 사실  딱 여기까지, '이야기 수준'에서 과학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가 원래 좋아하는 일이다. 누가 칼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닌데 내 스스로 이런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게 바로 그 증거. 그건 내가 아마도 타고난 설명충이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물론 설명충이 설명을 항상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하길 좋아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손발이 오그라들만큼 열정적인 척 하긴 했다.

 

외국어로 판단하면 사람이 더 '이성적'이 된다?

2012년 시카고대 보아즈 케이사르 팀이 같은 선택지를 모국어와 외국어로 각각 물었다. 우리는 보통 '200명을 살린다'고 하면 받아들이고 '400명이 죽는다'고 하면 꺼린다. 똑같은 말인데 표현(틀)에 휘둘리는 것, 이게 틀짜기, 그 유명한 프레임 효과.. 또는 프레이밍 효과라고 이름 붙은 바로 그 현상이다. 그런데 외국어로 물으면 이 효과가 거의 사라지고, 손실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성향도 누그러지더란다. 외국어로 판단할 때 사람들은 감정적 편향에 덜 휘둘렸다고.

 

더 유명한 건 2014년 알베르트 코스타 팀의 트롤리 딜레마다. 전차가 다섯 명을 향해 달려가고, 내가 옆의 덩치 큰 사람을 육교에서 밀면 그 사람은 죽지만 다섯이 산다. 밀겠는가? 모국어로 물었을 때 '밀겠다'는 20%가 채 안 됐는데, 같은 질문을 외국어로 던지자 절반 가까이로 (연구에 따라 44%에서 50%까지) 뛰었다.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화자에겐 영어로, 영어가 모국어인 화자에겐 스페인어로 물어도 결과는 같았다. 특정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을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나?.. 비슷한 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에게 해가 없지만 역겨운 행동을 외국어로 읽으면 덜 비난하더라는 후속 연구도 있다.

 

같은 딜레마, 다른 언어. 미는 비율이 20%에서 절반 가까이로 뛰었다.

 

왜? 두 가설이 싸운다

왜 외국어로 판단하면 달라질까. 설명은 크게 두 갈래로 갈린다.

 

첫째, 숙고 강화 가설.

외국어는 처리하기 힘드니 머리에서는 '정신 차려야겠다' 하고 더 꼼꼼한 모드로 들어간다는 것. 수학 문제를 읽기 힘든 폰트로 인쇄하면 실수를 덜 한다는 유명한 실험이 근거였다. 그럴듯하긴 한데.. 사실 이 폰트 실험은 나중에 재현이 잘 안 됐다고 한다.

 

둘째, 감정 둔화 가설.

모국어는 사랑받고 혼나던 어린 시절 한복판에서 배운 언어라 단어마다 감정이 배어 있다. 반면 외국어는 교실에서 무미건조하게 배운다. 그래서 외국어로 들으면 감정의 볼륨이 줄어든다. 실제로 모국어 욕설이나 지적을 들을 때 사람 몸은 (피부 전기 반응으로) 확 긴장하는데, 외국어로 들으면 잠잠했다고 한다. 외국어 욕이 덜 부끄러운 이유다. 뭐, 물론 외국어 욕을 들었을 때 그 욕이 담고 있는 문화적, 감정적 깊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모국어 욕설과 지적엔 몸이 먼저 반응한다. 외국어엔 잠잠하다.

 

어쨌든, 둘 중 어느 쪽이 더 실체에 가까울까. 2016년 한 연구는 외국어로 읽을 때 사람들이 의도는 덜 따지고 결과를 더 따진다는 걸 보였다. 곰곰이 따지는 '숙고'가 강해지면 의도를 더 봐야 정상이다. 결과만 보는 건 감정이 빠진 쪽에 가깝다.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손상된 환자도 딱 이런 식으로 판단한다고 한다. 적어도 도덕적인 판단 영역에서는 '감정 둔화' 쪽에 무게가 좀 더 실리는 것 같다.

 

원인을 두고 '감정 둔화'와 '숙고 강화'가 다툰다.

 

'그럼 나는?'

여기서 조금 솔깃한(?)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데, 이 효과가 동아시아 사람들에겐 약하게 나온다는 연구들이 있다. 한 연구의 한국인 표본에서는 모국어로 물었을 때 그 사람을 밀겠다는 답이 아예 0명이었다. 누군가를 직접 밀어 죽인다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그만큼 강했던 것. 외국어로 물으니 올라가긴 했지만 그 차이도 7.5%p 정도로 서양보다 작았다. 즉 외국어 효과는 인간 보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문화의 규범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 실험실의 '20%가 50%로'라는 숫자를 내게 그대로 붙이긴 좀 조심스럽다. 나는 한국인이니까. 뭐랄까.. 이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더 많이 고민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언어는 사고의 운영체제일까

여기서 잠깐 또 옆길로 새 볼까..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보면, 신지와 아스카가 에바 2호기에 같이 탔더니 사고 체계가 뒤섞여 오류가 나자, 아스카가 에바의 사고 체계를 일본어 기반으로 바꿔 전투를 잇는 장면이 있다. 그걸 처음 봤던 중학생 때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스카는 사고의 기반 언어를 마음대로 갈아 끼우는 게 가능하구나. 좀 멋진데.. 물론 그 캐릭터는 사고의 기반이 되는 언어 체계를 뭘로 바꾸든 성격이 일관된 것 같아 보이긴 했다.

 

에바와 다르게 우리는 언어를 바꾼다고 '운영체제'가 통째로 바뀌진 않을거다. 에반데..

 

뭐, 어쨌든,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외국어 효과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언어가 세계관을 규정한다는 가설이 있다지만, 그게 또 그렇게까지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모양이다. 에바와 다르게 우리는, 사고의 기반 언어가 바뀐다고 해서 운영체제가 통째로 바뀌는 게 아니라, 감정이라는 볼륨이 한 칸 내려가는 정도에 가까울거다. 좀 둔감해진다고 해야 할까. 에바 이야기는, 언어와 사고체계에 대한 짤막한 생각거리로 그냥 끼워 넣어 보았다. 외국어로 말하기와 외국어로 생각하기. 경계를 어디로 잡아야할까. 나는 외국어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상상은 잘 되지 않는다만.. 한 가지는 선을 긋고 가자. 외국어 효과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야기까지는 뻗어가지 않는다. 언어가 세계관을 규정한다는 강한 주장, 사피어-워프 가설은 색깔 이름을 다룬 지난 글에서 정리했듯 그렇게까지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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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파란불은 사실 초록불이다.'에서 시작해서 파란색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하는 고대 그리스 이야기까지. 색깔을 지칭하는 '이름'이, 색깔을 바라보는 우리 눈을 어떻게 바꾸는지 따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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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반전? - 잘할수록 사라진다

자, 어쨌든, 이 외국어 효과는 외국어가 능숙해질수록 약해진다고 한다. 어중간한 중급까지는 꽤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거의 모국어처럼 외국어가 능숙해지면, 이 외국어 효과는 점점 흐릿해지거나 사라진다. 외국어에도 감정의 때가 묻으면 모국어와의 심리적 거리가 사라지기 때문일까. 그러니 그날 나를 대담하게 만든 건 내 영어 실력이 그만큼 서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번역해서 외운 것을 겨우 뱉는, 그 어설픈 거리가, 전공 부담도 긴장도 한 톤 눌러준 셈이랄까. 내가 만약 영어를 더 잘했다면, 오히려 더 위축됐을지도 모른다. 결국 영어를 못하는 게 발표의 무기였다니, 이거 웃프네. ㅎㅎ

 

외국어를 잘할수록, '외국어효과'는 사라진다.

 

물론 단서는 달아야 한다. 외국어 효과는 여러 문화에서 반복 확인된 제법 튼튼한 현상이지만, 효과가 안 나온 연구도 있다(특히 외국어에 아주 능숙한 사람들). 그러니 '외국어로 말하면 무조건 대담해진다'고 단정하긴 어렵고, '특히 외국어가 아직 좀 불편한 사람에게서 그런 경향이 있더라' 정도로 읽는 게 맞겠다. 어쨌든 적어도 나 한 사람에게는 꽤 잘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다음에 또 영어로 발표할 일이 생기면, 나는 또 뻔뻔해 지겠지. 어차피 잘하지도 못하는 거, 그 심리적 거리라도 방패로 써먹든 해서 말이다.

 

뭐, 좀 뻔뻔해지면 어때. 넌 뻔뻔해졌다. 돌격해


글 닫기 전에..

외국어로 말하면 정말 더 이성적이 될까?

도덕 판단이나 손익 계산에서 모국어보다 감정적 편향이 줄고 더 계산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은 여러 실험에서 관찰됐다. 단 '무조건'은 아니다.

 

외국어로 욕하면 왜 덜 부끄럽다는 것인가?

모국어 욕설엔 어릴 때부터 감정이 배어 있어 말하는 자신에게도 강하게 꽂히는데, 외국어 욕설은 그 감정의 무게가 덜 실리기 때문.

 

영어를 잘하게 되면 이 효과는 사라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경향이 있다. 외국어가 익숙해지면 감정적 거리가 줄어 효과도 흐려진다.

 

한국 사람한테도 똑같이 적용될까?

솔직히 모르겠다.. 동아시아 표본에선 효과가 더 약했고, 규범이 강한 판단에선 외국어를 써도 잘 안 흔들렸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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